정은형



ARTIST TALK


작가 노트



나는 영원하지 않은 것들, 쉽게 부서지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에 마음이 간다. 시간이 지나며 녹슬고, 휘고, 부서지는 재료들, 천과 시멘트, 강철과 녹슨 철, 빛과 그림자처럼 상반된 성질을 지닌 재료들을 병치하며, 그 안의 긴장과 공존을 드러낸다. 내 작업에서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은 언제나 잠정적 형태 속 에 있다. 이는 단단히 굳어진 조각이기를 거부하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형태와 기능이 변하는 ‘퍼포먼스적인 조각’으로 이어진다.


나는 종종 주변과 완전히 동화되기 위해 나 자신이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자신을 지우고 나면 ‘나는 지금도 살아 있는 걸까, 혹은 죽은 몸에 기생하 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조각은 그런 나를 위한 방어적 쉘(shell)이자, 도피처이며, 또 다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장치다. 나는 내가 조각을 돌보듯, 조각 역시 나를 돌본다고 느낀다. 나에게 조각은 돌봄이 필요한 객체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질서를 만들어가며 자립하는 주체로 성장하길 바란다.



이러한 작업의 밑바탕에는 ‘상실’이라는 주제가 놓여있다. 소중한 기억의 상실, 방향과 정체성의 상실, 그리고 생물 다양성의 상실. 

그것들은 단지 아픔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계기가 된다. 퍼포먼스 속 생명체들은 시야를 잃고, 비대한 신체로 균형을 잃은 채 방황한다. 그들의 몸은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있지만, 그 안에는 아직 펴지지 않은 가능성과 저항의 몸짓이 숨어있다. 

나는 그들이 내딛는 불완전한 걸음에서 우리가 잃은 것들과 아직 잃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본다. 


상실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움직임의 시작이며, 방향 감각을 잃는 순간조차도 새로운 경로가 열리는 과도기의 시간이다.

정체성의 상실을 이야기하는 한 방식으로, 나는 고정된 정체성을 거부하고, 사회적 규범과 충돌하며 살아가는 몸에 주목한다. 나는 육체적 손상이 아닌,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 부합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심리적 고통에서 출발한다. 정체성과 자아의 균열에서 비롯된 심리적 고통이 어떻게 외형으로, 혹은 움직임으로 드러나는지를 조형 언어로 탐구한다. 


이 신체들은 매끈한 도시의 표면에 녹아들지 못하고 경계에서 부유하며,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려 애쓰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 뿐 아니라 동식물의 신체 일부가 변형된 존재들로 구현되며, 정상성과 비정상성 사이의 경계를 묻는다. 그들은 해체 와 재조립의 과정을 통해 혼란 속에서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방향을 찾아간다.


이러한 감각은 내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거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거울은 때로 정체성을 또렷하게 반영하지만, 동시에 주변을 반사하며 점차 자신을 잃어가는 표면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속에서 정체성을 지우며 주변과 섞이려는 존재임과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존재인 나 자신을 본다.



나에게 작업은 하나의 질문이자 저항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부합하려 애쓸수록, 나는 방향을 잃고 더 방황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방황이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믿는다. 한 퍼포먼스에서 머리였던 조각이 다른 장면에서는 균형을 잡는 꼬리가 되듯, 역할의 전환은 실패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렇게, 나의 조각은 완결을 거부하며, 부서지고 생분해되며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은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나아간다. 

끊임없이 부서지며 깨지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이어간다.






<또다시, 양재천에서>

 

정애숙 시인과 협업

노란 낙엽으로 만든 펄프지,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께 쓰신 닿을 수 없는 편지 (시)

사진 프린트 | 가변 설치 | 2021






새벽 안개 자욱히 피어 나던

어느 가을 아침이었지요


둘이 앉아 나누었던 바람 같은 말들

양재천 그 벤치는 지금도 잘 있네요




날은 저물어 가고

물새들도 집을 찾아 날아와

물위에 내려 앉는데


오지 않는 그대 환한 얼굴이

냇물에 얼비치어 눈물 납니다





사방은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그리움이 총총

별로 뜬 초저녁 무렵





그대는 지금 없고

지울래야 지워지지 않는 그리운 얼굴


노을 지는 하늘가에

흐릿하게 그려 놓고

이름만 가만히 불러보고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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